답사지소개

  • 남산(서울 조망)
  • 사직단
  • 광화문/경복궁
  • 종묘
  • 동대문(흥인지문)
  • 낙산공원(한양성)
  • 낙산공원(한양성)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 2-10
  • 답사항목 한양성, 낙산공원
  •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 연중무휴

낙산공원(한양성) 답사지 설명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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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답사지, 낙산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의 내사산 중 동쪽을 담당하는 낙산은 현재 낙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답사단 리더 조성호 선생님과 함께 새로이 복원된 한양 성곽의 모습을 확인해보세요.
낙타를 닮은 산, 낙산
낙산은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돌산입니다. 산 모양이 낙타를 닮았다 해서 낙산이라 이름 붙였으며, 낙타산으로도 불립니다. 낙산은 풍수지리적으로는 북악산의 좌청룡에 해당하지만, 산이 얕아 풍수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동대문에 다양한 기법들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 기억나시죠?
한양성에서 역사의 흐름을 읽다
한양성은 태조가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입니다. 처음엔 17km 정도 되는 길이었다고 하는데, 점차 증축이 되면서 지금은 길이가 많이 변경되었습니다.
한양성은 세종 때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 방어 시설을 늘렸다고 합니다. 숙종 때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그 당시의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네요. 여러 번의 수리에도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곽을 보면 적군에게 총이나 활을 겨누기 위한 여장구멍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 곳을 겨냥하는 정사각형 원총안, 가까운 곳에서 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직사각형 근총안으로 구분되어 있답니다.
또한 성곽 곳곳에 군사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안문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낙산공원, 노을이 물드는 종착지
서울의 곳곳을 직접 디뎌가며 공부하는 사이, 어느덧 멋진 노을이 찾아왔네요. 마지막 햇살을 주워담듯 하루 동안의 즐거운 여정을 꼼꼼하게 정리해봅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우리 곁에 있는 서울의 역사와 마주한 느낌, 무척 뿌듯하고 즐거웠답니다.
오늘 돌아본 답사지들은 이제 무심코 지나치지 못할 것 같네요!

곰소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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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서울 한양도성 관련 정보

1.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산으로, 높이는 약 125m이다.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성곽으로 이어졌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낙산에는 낙산의 유방이라고 불렸던 약수터 2곳이 있었는데 각 이화동약수, 신대약수로 불렸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이 낙산 인근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인평대군이 거처했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고, 그 외 이화정(梨花亭), 일옹정(一翁亭), 백림정(柏林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 근래에는 한 때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지만,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철거되고 성곽이 복원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2.서울 한양도성

지정번호 : 사적 제10호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출처 :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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