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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지소개

  • 남산(서울 조망)
  • 사직단
  • 광화문/경복궁
  • 종묘
  • 동대문(흥인지문)
  • 낙산공원(한양성)
  • 광화문/경복궁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1 답사항목 광화문, 경복궁
  • 입장료 어른(19세~64세) 3,000원 / 만 18세 이하 무료
  • 관람시간 매주 화 휴무
    9~18시(3~10월), 9~17시(11월~2월), 휴일·공휴일 15시까지(5월~8월)
  • 관련홈페이지경복궁 http://www.royalpalace.go.kr

광화문 답사지 설명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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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에서 찬찬히 걸어 광화문에 도착했습니다. 경복궁으로 들어서기 전, 광화문의 역사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도록 할께요.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광화문 앞의 큰 길을 세종로라고 부르는데, 조선시대에는 주작대로라고 불렸습니다.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사신들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중, 남쪽을 수호하는 주작의 이름을 딴 이름이었답니다. 이 주변에 6개의 중앙 관청인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어 육조거리라고도 불렸다고 하네요.
지금도 세종로는 중요한 공공기관들과 언론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주요거리로 유명합니다.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어섰습니다. 경복궁은 서울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당이라 불려지는데, 어떤 지형 때문인지 궁금해지네요. 답사단 리더 조성호 선생님과 함께 경복궁의 숨은 비밀을 따라가봅니다.

경복궁 답사지 설명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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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명당,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은 왕과 그 자손 그리고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길 기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복궁이 명당이라 불려진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북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복궁 내에서도 왕이 주관하는 중요한 행사(즉위식, 대관식)를 진행했던 근정전이 명당 중의 명당이라 알려져 있답니다.
근정전의 마당에는 사직단에서 보았던 박석들이 깔려있고, 조선시대 백관의 품계를 새겨 나열한 품계석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비보풍수[裨補風水]
경복궁은 북악산을 타고 기가 모이는 명당이었지만, 산이 얕아 바람을 막지 못해 화재 위험이 있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풍수에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주는 것을 비보풍수라고 하는데, 경복궁에도 비보풍수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
명당 경복궁에서 확인한 풍수지리의 비법들은 참 아기자기하고 신기하네요.
풍수지리는 결국 자연과 함께 인간이 더욱 이롭게 번창하기를 바라는 조상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광화문에서 이루어진 행렬은 우연히 시간을 맞추어 보게 된 색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광화문, 경복궁을 방문할 예정이 있다면 이 화려한 행사 일정을 꼭 챙겨보세요.
광화문, 경복궁 답사 후기

곰소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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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1.광화문(光化門)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은 경복궁과 함께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태조 4년) 건립됐다. 건립 당시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었으나 이후 1425년(세종 7년)에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의 광화문(光化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는 『서경(書經)』 의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구절에서 차용해 붙여진 것이다.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는 건춘문, 영추문, 광화문, 신무문 등 4개의 대문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이후 270여 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 1865년(고종 2년) 왕실의 존엄성을 과시하고자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광화문도 함께 복원했다. 1차 중건은 7년 5개월간 이어졌으며, 고종 연간의 경복궁은 사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최대 7,721칸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내에 들어서면서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됐다. 이때 일제는 경복궁을 헐고 조선총독부를 짓고 광화문을 남산에 지은 조선신궁을 바라보도록 원래의 축을 3.75도 틀었다. 한국전쟁 때는 포탄을 맞아 축대만 남고 불에 타 사라졌고,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68년 석축 윗부분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경복궁 정면에 다시 세웠다.
하지만 원래 광화문이 서 있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벗어나 있었고 각도 역시 경복궁 중심 축을 기준으로 3.75도 틀어진 채였다. 중건 당시 경복궁은 백두산 정기와 지리산의 맥이 모여 한반도의 기운이 합쳐진다는 의미에서 뒤로는 백악산(북악산), 앞으로는 관악산과 연결되는 축에 놓여 있었다.
2.광화문 복원
조선 고종 때인 1865년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공사를 마친 광화문이 65주년 광복절이던 2010년 8월 15일 공개됐다. 2006년 12월 시작되어 완공까지 3년 8개월이 걸린 광화문 복원공사에는 총 280억 여 원이 투입됐으며, 복원된 광화문이 공개되면서 20년간 진행된 경복궁 1차 복원사업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문화재청은 2011년부터 다시 20년간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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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복궁(景福宮)

지정번호 : 사적 제117호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출처 :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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