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3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길게 쭉 뻗어있는 왕복 4차선 도로 양 옆으로 한자어로 된 간판과 현수막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이런 공간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디지털공단 사이에 이렇게 낙후된 공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하지만 오히려 마음 한 켠에는 이런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더욱 커진다.
바로 이곳이 가리봉동(加里峰洞)이다. 한국 산업의 성장을 이끌어냈던 산업 역군들의 삶의 휴식처답게 지금도 누군가의 휴식처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원래 ‘가리봉’이라는 이름은 마을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 이름 때문일까? 마을의 작은 건물들 하나하나가 봉우리처럼 느껴진다.

서울디지털 1단지와 2,3단지 사이 한 복판에는 최신식 아파트형 공장들과는 거리가 먼 오래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1960년대부터 구로산업단지의 근로자들이 공단 근처에 자리 잡고 살았던 지역으로 한국 산업 역군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장소다. 지금도 그 추억의 공간이 크게 변화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그마한 방 하나에 부엌이 딸려 있어 집들을 쪽방이라 하였고, 이런 지역을 묶어서 쪽방촌이라 불렀다.
아직도 집집마다 대문 앞에 임대를 놓는다는 안내글을 볼 수 있다. 임대 가격을 보면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보증금 50만 원에 월 14만 원이라는 저렴한 월세다.
사람들은 구로공단이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쪽방촌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8서울올림픽 이산가족 찾기, 1992년 한중수교 등으로 인해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붐이 일어나면서 그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1990년대 초반 분당, 평촌 등 1기 신도시 200만 호를 건설하게 되면서 건설 현장의 역군으로 중국동포들이 상당수가 들어오게 된다.
2010년 행정안전부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무려 126,000여 명의 조선족이 서울에 산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구로구와 금천구 영등포구 지역에 사는 사람이 50%나 된다. 2012년 3월 말에 무등록 조선족까지 합한 조사 결과를 보면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15,000여 명에 달한다. 가리봉동 총 주민수가 14,343명인 것으로 볼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지하철 3번 출구를 나가 왕복 4차로인 구로동 길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남부순환도로, 왼쪽으로 우마길이 연결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미 내려 오면서부터 빨간색 입간판과 안내 표지판 때문에 조선족 거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삼거리에서 우마길로 들어서니 더욱 이질감이 커진다. 내가 왠지 타지인처럼 느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골목길을 바라본다. 이곳이 바로 ‘연변 거리’다.

조선족들이 한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래서일까 골목마다 인력 업체들이 자리잡고 있다. 자재 정리부터 미장, 식당보조까지 다양한 일들을 한다. 그들은 한국에 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리잡을 것을 기대한다. 문제는 한국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정상적으로 입국을 하는 경우보다 비정상적으로 입국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체류하는 조선족 45만여 명 가운데 29만여 명이 방문취업비자로 입국했다. 방문취업비자는 30만 명 정도로 인원 제한이 있고, 입국한 이후 약 4년 정도 만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약 29만여 명 정도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계속 머물면서 불법체류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물론 전문직이나 기업인들은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한국인들과 똑같은 법적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다.

연변거리에서 눈에 가장 많이 띄는 것은 여행사와 통신사들이다. 식당들도 많지만, 여행사와 통신사들이 더욱 시선을 사로잡는다. 우마길 초입에 있는 여행사 이름은 ‘천안문’이다. 중국을 상징하는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중국 간체자로 '외국인 당일개통, 선불폰'이라고 적힌 통신사의 빨간색 입간판들은 이 곳을 마치 중국 연변으로 착각 하게끔 한다.
조용했던 우마길은 저녁이 되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이곳 저곳으로 일을 나갔던 사람들이 연변거리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붐비는 곳은 골목길의 식당들이다. 금강산도 식구경이라 했나? 우마길 골목,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식당들은 주름잡아 130여 개나 된다. ‘양뀀’(양꼬치구이), ‘훠궈’(샤브샤브), ‘꿩바러우’(찹쌀탕수육), ‘국수(냉면)’ 등 조선족들이 즐겨먹는 연변 음식 거리가 펼쳐진다.
이 곳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해서 음식까지 저렴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일을 하고 돌아온 조선족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는 냉면 하나만 해도 가격이 5000원이다. 한국의 여느 식당들과 비교 해봐도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조선족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양꼬치 구이다. 그래서일까? 여기 식당들의 주 메뉴는 양로우촨(洋肉串:양꼬치구이)이다. 양꼬치 구이는 얇게 썬 양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숯불에 익혀 먹는 것이다. 별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위구르인과 몽골인들이 즐겨 먹는 향신료인 '쯔란'과 양념을 함께 찍어 먹으면 된다.